서울을 탈출하고 싶었다. 여행이 아니라 생활로.
국내에서 어디가 좋을지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검색할수록 나오는 건 지방 인구소멸, 빈집, 불 꺼진 상가와 같이 우울한 지방도시의 현실 이야기뿐이었다.
그럼, 지방의 삶은 우울하기만 할까. 그건 우리의 선입견일 수 있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서울 밖 도시의 삶을 경험해 보고 싶다. 하지만 관광 말고 지방 도시에 갈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구독도시. 5축 라이프스타일 테스트로 나에게 맞는 도시를 찾아주고, 그 도시를 구독하듯 경험하게 해주는 서비스. 속초를 첫 도시로 잡고, 랜딩페이지를 만들고, 앱 경험을 설계하고, 공모전에 제출했다.
결과부터 말하면, 실패했다. 공모전은 떨어졌고 서비스는 세상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글은 서비스가 왜 안 됐는지를 쓰려는 게 아니다. 서비스를 만들기 전에 시장 분석을 세 번 했고, 세 번 다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냈다. 문제는 거기 있었다. 기획자가 자기 기획을 검증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 — 분석이라는 이름의 확증편향에 대한 이야기다.
구독도시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전에 세 종류의 분석을 했다. 생성형 AI를 활용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각각 다른 각도에서 시장을 들여다봤다.
첫 번째는 경쟁사 분석. 한달살러, 리브애니웨어, 스터멘션, 다자요 — 시장에 있는 플레이어를 전부 펼쳐놓고 누가 뭘 하고 있는지 정리했다. 결론은 “관계인구 경험 설계 플랫폼은 아무도 안 하고 있다, 빈틈이다.”
두 번째는 리스크 리서치. 지방소멸대응기금 예산 낭비, 귀농귀촌 통계의 코로나 특수, 한달살기 재방문율 부재 — 안 될 이유를 찾아보는 작업이었다. 결론은 “리스크는 있지만 올바른 접근이면 극복 가능하다.”
세 번째는 시장성 검토. 한달살기 시장과 두지역살이 시장을 구분하고, 타겟별 수요 신호를 분석하고, B2C·B2G 경로를 비교했다. 결론은 파일럿 도시를 찾아서 시장성을 파악해 보자. 첫 번째 파일럿 도시는 속초, “속초 단독으로 좁혀서 B2C 검증을 하면 된다.”
세 번의 분석. 세 개의 문서. 그런데 세 결론을 나란히 놓으니 이상한 게 보였다. “빈틈이다 → 극복 가능하다 → 좁혀서 하면 된다.” 표현은 다르지만 말하는 건 전부 같았다. 제대로 하면 된다.
제대로만 하면 될까? 내가 놓친 건, 이건 나만을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백 페이지의 자료를 읽고, 수십 개의 출처를 정리하고, 몇 주를 들여서 — 결국 처음에 믿고 싶었던 것과 똑같은 결론에 도착한 거다.
세 번 같은 결론이 나온 구조를 뜯어보니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분석 안에서 “안 된다”를 말해주는 근거들은 출처가 탄탄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보고서, 국회입법조사처 자료, 한국지방자치학회 논문, 통계청 생활인구 매뉴얼. 지방소멸대응기금이 나눠주기식으로 집행되고 있다는 것, 귀농귀촌 51만 명이 코로나 특수 수치라는 것, 재정자립도에 체류인구가 미치는 영향이 0.348%에 불과하다는 것 — 이런 비관 근거는 1차 자료와 학술 문헌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반면 “된다”를 말해주는 근거들은 출처가 약했다. 서울 청년 지방 이주 의향 40.4%는 브런치 글에서 재인용한 숫자였고, 워케이션 참가자 수와 지원금 액수는 블로그와 유튜브에서 가져온 추정치였고, 한달살기 거래액 272% 성장은 외국인 인바운드 데이터를 내국인 수요로 전용한 것이었다.
정리하면 이랬다. 비관 근거는 학술지와 정부 보고서에서 나왔고, 낙관 결론은 블로그와 추정치로 만들었다. 출처의 질이 비대칭이었는데, 분석하는 동안에는 그게 안 보였다.
왜 안 보였을까. 분석의 목적이 처음부터 “나만이 할 수 있다”를 확인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면 그럴 리 없다며 더 찾아봤고,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면 거기서 멈췄다. 브런치 글 하나의 40.4%는 바로 채택했지만, 국회입법조사처의 구조적 한계 분석은 “리스크 요인”으로 분류하고 넘어갔다. 같은 분석 안에서 비관과 낙관의 입증 기준이 달랐던 거다.
이건 분석이 아니라 확증편향의 포장이었다. 특히 생성형 AI를 활용해서 자료를 찾고 분석한다면, 이런 경향성은 더 한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 AI는 사용자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동의하도록 기본 설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분석이 끝났을 때 내가 내린 결론은 “고민해보자”였다. 예산과 정책 방향은 있지만 대중이 그걸 원하지 않고, 기존 강자가 안 들어간 데는 이유가 있다 — 여기까지 봤으면서 “고민해보자”로 끝냈다. 내가 실패했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세 문서가 모은 근거를 정직하게 합치면, 구독도시의 다도시 매칭 OS라는 원래 비전은 폐기해야 했다. 시장의 핵심 행동(장기·반복 다지역 거주)이 소수만 하고 있었고, 그 이유가 도구 부재가 아니라 일자리·인프라라는 구조적 제약이었고, 데이터를 가진 경쟁사들이 그 빈틈에 들어가지 않는 건 빈틈을 못 봐서가 아니라 수익이 안 나서였다.
근거는 내 손에 있었는데,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고민해보자”는 판단의 유보이고, 판단을 유보하는 건 기획자의 직무유기다. 내 기획은 달라, 부정적인 피드백에도 네가 못 보는 걸 나는 보니까. 잘 보라고 으스대고 싶었을까.
기획자가 시장을 분석할 때 가장 어려운 건 자료를 모으는 일이 아니다. 자료가 가리키는 방향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과 다를 때, 그걸 인정하는 일이다. 분석을 반복할수록 결론이 수렴하면 — 그건 확신이 쌓이는 게 아니라 같은 편향이 반복되고 있다는 신호다. 하지만 쉽게 그 알람을 무시한다. 해보고 싶으니까, 나라면 다를 테니까 — 이게 보여주는 건 극단적인 자기 확신이다. 이걸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구독도시에서 내가 배운 건 서비스 설계도 시장 데이터 구조도 아니었다. 숫자가 가설을 죽이려 할 때, 나는 격렬하게 그를 거부했다. 그리곤 장렬히 실패했고, 지금은 점잖게 이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도시질문은 도시 기획자가 직접 부딪힌 질문들을 기록하는 시리즈입니다. 다음 편: 빈틈은 기회다? 그건 바로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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